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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후사3]일본은 언제부터 다시 군대를 갖게 됐을까

일본 전후사

by sensei-jojo 2026. 7. 1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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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한 나라가 헌법 9조로 전쟁을 포기했는데, 불과 몇 년 만에 경찰예비대라는 이름의 사실상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은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이 민주화와 비군사화의 길을 걷다가 방향을 되돌리기 시작한 그 시기를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흔히 "역코스(逆コース)"라고 부르는 흐름이죠.

 

헌법을 교육으로 완성하려 했던 법

먼저 교육 이야기부터 해볼게요. 1947년 3월, 교육기본법(教育基本法)이 만들어집니다. 이 법이 재미있는 건, 보통 법률에는 전문(前文)을 붙이지 않는 게 관례인데도 굳이 이례적으로 전문을 두었다는 점이에요. 그 전문에는 "일본국헌법의 정신에 따라" 교육의 목적을 명시하고 새로운 일본 교육의 기초를 세운다는 취지가 담겼습니다. 헌법의 이념을 교육이라는 현장에서 구체화하겠다는 선언이었죠.

 

내용도 상징적이었습니다. 교육의 기회균등, 남녀공학, 개인의 존엄과 평화 같은 가치를 앞세우면서, 교육은 부당한 지배에 굴복하지 않고 국민 전체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진다고 밝혔습니다. 전쟁 전 국가주의 교육에 대한 반성이 짙게 깔려 있었던 거예요. 참고로 이 법이 공포·시행된 정확한 날짜는 1947년 3월 31일이고, 당시에는 아직 시행 전이던 일본국헌법과 짝을 이루도록 설계됐습니다. 육삼삼사제라는 새 학제도 이 무렵 자리를 잡습니다.

승자가 패자를 심판한 도쿄재판

같은 시기 일본을 뒤흔든 또 하나의 큰 사건이 도쿄재판(東京裁判), 정식 명칭으로는 극동국제군사재판(極東國際軍事裁判)이었습니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28명이 A급 전범으로 기소됐고, 1946년 5월 3일 개정해 약 2년 반의 심리를 거쳐 1948년 11월에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재판 도중 사망하거나 소추가 취소된 인물을 빼면 피고 전원이 유죄, 그중 7명이 교수형, 16명이 종신금고형에 처해졌죠.

이 재판을 통해 일본 국민이 처음 알게 된 사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만주사변, 즉 류탸오후 사건(柳条湖事件)의 진상이었어요. 사건 당시 일본 국민은 만철 선로를 폭파한 게 중국군의 소행이라는 군부의 발표를 그대로 믿었고, 신문과 라디오는 반중 캠페인을 벌이며 전쟁 열기를 부추겼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관동군의 모략이었다는 사실이 재판을 통해 드러난 겁니다. 이걸 알게 된 사람들은 권력과 언론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진심으로 느꼈다고 해요.

물론 도쿄재판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집니다. 인도의 팔(Pal) 판사나 일본 측 변호인(기요세 이치로 등)은 "평화에 대한 죄"가 사건 이전으로 소급 적용될 수 없다는 원칙을 들어 재판의 정당성을 문제 삼았습니다. 반면 네덜란드의 뢰링(Röling) 판사처럼, 핵무기 시대에는 국제법을 근대 과학병기 개발에 맞춰 진화시키는 일이 불가결하다고 본 시각도 있었죠. 재판을 승자의 심판으로 볼 것인가, 국제법의 진전으로 볼 것인가. 글쎄요.

 

도조 히데키

천황의 전쟁 책임이라는 공백

도쿄재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쇼와 천황(昭和天皇)의 전쟁 책임 문제예요. 이 재판은 승자에게 유리하게,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용된 면이 있습니다. 그 대표가 바로 천황의 전쟁 책임을 불문에 부친 일이었죠. 아시아에서 이백만 명, 일본에서 삼백십만 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최고 책임자였던 천황에게 아무 책임도 없다는 게 과연 말이 될까요?

쇼와 천황 자신도 한때 퇴위를 고민했다고 전해지지만, 결국 퇴위까지 밟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천황의 협력을 얻고 싶었던 맥아더의 계산도 작용했어요. 점령 통치를 안정적으로 끌고 가려면 천황제를 무너뜨리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렇게 맥아더와 천황의 정치적 공생이 시작됐고, 천황은 스스로의 전쟁 책임에 대해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공백은 전후 일본인의 전쟁 책임 의식 자체를 옅게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고 평가받습니다.

냉전이 바꿔놓은 점령정책

이제 흐름이 크게 꺾이는 지점으로 가봅니다. 1946년 3월, 영국 전 총리 처칠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 이른바 "철의 장막" 연설을 합니다. 곧이어 1947년,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나오고, 소련은 이에 맞서 동유럽 국가들을 유럽부흥계획에서 이탈시키면서 냉전이 본격화됐습니다.

냉전이 격화되자 미국은 일본을 대하는 태도를 바꿉니다. 처음의 비군사화·민주화에서, 일본을 공산주의를 막는 방파제로 삼겠다는 쪽으로요. 이 방향 전환의 밑그림을 그린 인물이 국무성 정책기획실장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었습니다. 1948년 10월에 나온 대일 권고 문서(NSC 13/2)는 점령 종결 후 일본의 경제 안정과 안전보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 이후 대일 점령정책 전환의 골격이 됩니다.

다시 무장으로 향하는 일본

대일 점령정책 전환은 경제에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1949년 3월, 디트로이트은행 총재 출신인 닷지(Dodge) 공사가 경제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른바 닷지 라인을 밀어붙입니다. 초균형 예산, 부흥금융금고 대출 정지, 1달러=360엔 단일 환율 같은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한 거죠. 인플레는 잡혔지만 경제는 거꾸로 불황에 빠졌고, 중소기업 도산과 실업이 늘었습니다. 그 여파는 공무원과 국철(국유철도)로도 번져, 국철에서만 십만 명 규모의 대량 정리해고가 예정될 정도였어요.

이 감원은 국철 노조를 자극해 노사 긴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1949년 여름, 국철을 둘러싼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이 잇따라 터집니다. 국철 총재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시모야마(下山) 사건이 일어났고, 미타카(三鷹) 사건에서는 무인 전차가 폭주했으며, 마쓰카와(松川) 사건에서는 열차가 전복됐습니다. 세 사건 모두 미궁에 빠졌지만, 당시 분위기 속에서 공산당원과 그 지지자들에게 혐의가 쏠렸고, 이는 레드 퍼지(Red Purge), 즉 공산주의자 축출의 물결과 맞물렸습니다.

 

불황에 신음하던 일본 경제를 단숨에 되살린 건 뜻밖에도 전쟁이었습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군이 쏟아낸 군수 특수(特需)가 일본에 특수 경기를 안겼고 흐름은 완전히 뒤바뀌죠. 같은 시기 맥아더의 지시로 경찰예비대가 창설되면서, 헌법 9조로 전쟁을 포기했던 나라가 사실상 재무장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일본국헌법 시행 이후 겨우 삼 년째의 일이었죠.

"역코스"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이 되돌아가는 흐름을 부르는 이름이 바로 역코스입니다. 이 말은 1951년 11월,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이 연재한 특집 기사 "역코스"에서 비롯됐어요. 훈장, 캬바레에서의 군함 행진곡 부활, 신주쿠 교엔에서 열린 천황 주최 관국회 부활처럼, 조선전쟁 이후 문화적 복고에 초점을 맞춘 기사가 많았습니다. 이후 이 말은 영어 "the reverse course"로도 번역되며 미국 학자들까지 쓰게 됐습니다.

다만 역사학계에서 역코스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점령정책의 전환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애초에 "역코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반론까지 있어요. 미국 측 점령정책은 처음부터 반공을 방침으로 삼았으니 반파시즘에서 반공으로 옮겨간 것이 새삼스러운 "역행"은 아니라는 시각이죠. 반면 일본인 연구자들 중에는 "역사에서의 아픈 자각"으로서 역코스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어떤 틀로 기억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해석이 갈리는 겁니다.

 

 

<알려조선생>

https://litt.ly/finaleaf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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