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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후사4] 전후의 풍경, 문화, 영화

일본 전후사

by sensei-jojo 2026. 7. 24.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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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선수 한 명과 물리학자 한 명이 만든 1949년

 

1949년 8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전미수영선수권에 후루하시 히로노신(古橋広之進)이 출전합니다. 결과는 400미터, 800미터, 1500미터 자유형 세계신기록. 함께 간 하시즈메 시로(橋爪四郎)도 1500미터에서 세계기록을 냈습니다. 현지 신문은 그를 「후지야마의 나는 물고기(フジヤマのトビウオ)」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사실 후루하시는 이미 1947년 도쿄 진구 풀에서 열린 일본선수권 400미터 자유형에서 세계기록을 넘어서는 기록을 냈었어요. 그런데 그 기록은 공인되지 않죠. 당시 일본이 국제수영연맹에서 제명된 상태였거든요. 1948년 런던 올림픽에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일본 수영연맹은 런던 올림픽 수영 결승과 같은 날 일본선수권을 열었고, 후루하시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 빠른 기록으로 헤엄쳤습니다. 아무도 공인해 주지 않는 세계기록을요.

후루하시 히로노신

1949년 6월에야 국제수영연맹 복귀가 인정되었고, 그래서 그해 8월 로스앤젤레스 원정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원정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전이라 일본에는 달러가 없었고, 수영연맹 간부와 재미 일본계 사람들의 기부로 겨우 성사됐습니다. 그리고 대회가 끝나자 영웅이 되어있었습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습니다. 일본인 최초였어요. 중간자 이론을 1935년 무렵에 이미 내놓았는데, 1947년에 파이 중간자가 실제로 발견되면서 이론이 증명된 겁니다.

유가와 히데키

 

 

거리에는 노래가, 냉장고에는 미국이

같은 시기 거리에는 나미키 미치코의 「사과의 노래(リンゴの唄)」와 「사과 오이와케(リンゴ追分)」, 가사기 시즈코의 「도쿄 부기우기(東京ブギウギ)」가 흘렀습니다. 미소라 히바리는 천재 소녀 가수로 평판을 얻었고, 영화에서는 이마이 다다시 감독의 「푸른 산맥(青い山脈)」과 「슬픈 휘파람(悲しき口笛)」, 「도쿄 키드(東京キッド)」가 등장했죠.

 

 

신문에는 미국 연재만화 「블론디(ブロンディ)」가 실렸습니다. 재밌는건 당시 굶주렸던 일본인과는 다르게, 블론디의 냉장고에는 늘 식량이 가득 차 있었죠. 그 만화를 보면서 일본인들은 미국식 생활양식에 대한 갈망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놀았습니다. 사회인 야구, 딱지치기, 팽이, 깡통차기, 말타기. 청년단 활동도 활발했고 영화 감상회, 봉오도리 대회, 운동회가 자주 열렸습니다. 

동시에 니힐리즘도 꽤 크게 존재했죠. 아마도 정부와 군 수뇌부에 대한 신뢰가 너무나 무참하게 사라진 그 절망감이었을꺼에요.

 

주택난과 식량난은 숫자로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집이 없어서 방공호에 살고, 불탄 건물 잔해에 판자를 대서 지붕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시절엔 「합판과 고구마를 교환합니다」 같은 손으로 긁어 만든 유인물이 동네에 돌아다녔습니다. 인쇄기가 있을 리 없으니 가리방으로 밀어서 몇십 장 찍어 붙이는 거죠. 집 지을 판자와 먹을 것을 맞바꾸자는 이야기입니다. 둘 다 부족했으니까, 서로 없는 걸 나눠 가지는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도쿄 시부야에서는 학교 호안덴(奉安殿)에 사람이 들어가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호안덴이라는 게 뭐냐면, 학교마다 세워두고 천황 부부의 사진과 교육칙어를 보관하던 작은 건물입니다. 우리로 치면 일제강점기 학교에 있던 봉안전을 말하죠. 등하교할 때 그 앞을 지나가는 학생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경례를 해야 했습니다. 학교에서 가장 신성한 자리였죠.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처음에는 강당이나 교장실 안에 보관실을 두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화재나 지진이 나면 사진이 위험해진다는 게 문제가 됐어요. 그래서 금고식으로 바꾸고, 나중에는 아예 교사 건물과 분리된 독립 건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콘크리트나 벽돌로 튼튼하게, 신사처럼 생긴 모양으로요.

 

이야기가 조금 다른 곳으로 흐릅니다만, 이 호안덴을  따로 짓게 만든 계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사진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죠. 1893년 산리쿠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이와테현의 한 교사가 사진을 옮기려다 순직했거든요. 그런가 하면, 1921년에는 나가노현 소학교 교장이 불타는 교사 안으로 들어갔다가 죽었어요. 1937년까지 이런 식으로 순직한 교직원이 18명에 이릅니다. 그리고 다이쇼 시대부터는 이런 죽음이 미담으로 신문에 실리고 표창까지 받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어요. 세뇌의 절정이 아닐까 싶어요.

 

1898년에는 나가노현 학교에서 실화로 메이지 천황 사진을 태워버리자 교장이 책임을 지고 할복을 시도한 일도 있었습니다. 참고로 그 교장이 소설가 구메 마사오의 아버지였어요.

 

그런 자리에 사람이 들어가 살았다는 거죠. 몇 년 전까지 목숨과 맞바꿔야 할 만큼 무겁던 공간이, 갈 곳 없는 가족이 아이를 키우고 빨래를 널어 말리는 방으로 바뀐 겁니다. 

문학과 영화, 그리고 학도병의 유고집

문학에서도 전후는 독특한 공간이었습니다. 패전이라는 미증유의 체험 속에서 아라 마사히토와 히라노 겐, 그리고 나카노 시게하루 사이의 「정치와 문학」 논쟁을 시작으로 문학자의 전쟁 책임이 활발히 논의됐어요.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堕落論)』,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다무라 다이지로의 『육체의 문(肉体の門)』 같은 작품들이 전후의 혼란과 퇴폐 속에서 인간성과 성의 해방을 노래했습니다. 전쟁문학으로는 노마 히로시의 『어두운 그림(暗い絵)』과 『진공지대(真空地帯)』, 오오카 쇼헤이의 『포로기(俘虜記)』와 『들불(野火)』, 우메자키 하루오의 『사쿠라지마(桜島)』가 자신의 전쟁 체험을 담아 전쟁과 군대의 비인간성을 그렸습니다.

 

전후 문학도 전후 역사학과 마찬가지로 1951년까지가 정점이었고, 1952년에서 1956년 사이에 「전후」라는 이름의 시대가 사라져 갔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영화 쪽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몬(羅生門)」이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 그러니까 황금사자상을 받습니다. 일본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은 첫 사례였어요. 재미있는 건 일본 제작진 중 아무도 영화제에 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구로사와 본인은 작품이 출품된 사실조차 몰랐고, 수상 소식을 아내에게 들었다고 해요.

서양 영화 수입도 활발했습니다. 도쿄에서는 「타잔」, 서부극 「역마차」, 「망향」,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천장 사지의 사람들」, 「위대한 환영」, 「카사블랑카」 같은 작품이 관객을 사로잡았고, 1952년 이후에는 서양 영화 관객 수가 일본 영화를 웃돌기 시작했습니다.

 

 

이글은 이와나미 문고의 <전후사>를 참고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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