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이 되면 일본 뉴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정오에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총리가 추도식에서 묵념을 하는 모습이죠.
그런데 여기서 질문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일본은 정말 8월 15일에 '항복'했을까요?
엄밀히 따지면 아닙니다. 그리고 '8월 15일에 전쟁이 끝났다'는 말조차도, 실은 일본 안에서만, 그것도 절반쯤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던 1945년 여름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전역의 라디오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천황의 종전 방송, 이른바 '옥음방송(玉音放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방송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천황의 방송은 어려운 한문 투의 문어체였고, 라디오 음질도 형편없었거든요. 방송이 끝난 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또는 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아무래도 일본이 졌구나'를 실감했다는 증언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도시의 아이들은 공습을 피해 시골로 집단 피난을 가 있는 경우도 많았는데(学童疎開), 종전 후 돌아온 동네는 불타버린 들판, 일본어로 '야케노하라(焼け野原)'로 변해 있곤 했습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일본은 흔히 '8월 15일 = 전쟁 끝'이라고 단순하게 외우지만, 실제로 전쟁이 끝난 시점은 지역마다, 전선마다 제각각이었다는 점입니다.
8월 15일 천황의 종전 방송 다음 날인 16일, 일본 대본영(大本営)은 전군에 전투 행위를 즉시 멈추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명령 한 장으로 모든 전선의 총성이 동시에 멎은 건 아니었어요.
당시 일본군의 전선은 상상 이상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북쪽으로는 만주·몽골(만몽) 일대부터, 남쪽으로는 적도 너머 뉴기니까지, 남북으로 위도 60도에 걸친 어마어마한 범위였죠. 이렇게 전선이 길게 늘어져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종전'은 문자 그대로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키나와, 만주, 라바울, 뉴기니, 그리고 태평양의 여러 섬들 ,저마다 무기를 내려놓은 날이 달랐어요.

특히 비극이 집중된 곳은 오키나와와 만주였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본토 결전을 앞둔 시간을 벌기 위해 치열한 지상전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집단자결(集団自決)'이라는 참혹한 일이 있었습니다.
만주는 또 다른 의미로 참혹했습니다. 일본이 패색이 짙어가던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만주를 향해 침공을 시작합니다. 천황의 종전 방송이 나오기 엿새 전이었어요. 문제는 만주에 일본에서 건너간 개척단(開拓団), 즉 농업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정작 이들을 보호해야 할 관동군(関東軍)은 개척민을 버려둔 채 먼저 후퇴해버렸고, 무방비 상태로 남겨진 여성·노인·아이들은 죽음을 무릅쓴 피난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그 길에서 굶주림과 병, 습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부모를 잃거나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은 현지 중국인에게 맡겨져 자라났는데, 이들이 훗날 '중국 잔류 고아(中国残留孤児)'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일본과 중국의 국교가 회복된 1972년 이후에야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1년부터는 일본을 찾아와 헤어진 가족을 찾는 모습이 방송을 타기도 했죠. 패전 당시 해외에 있던 일본인은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660만 명이 넘었고, 이들이 일본 본토로 돌아오는 '히키아게 (引揚)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결국 8월 15일 정오에 라디오 앞에서 눈물 흘린 본토의 '종전'과, 만주의 황야에서 도망치던 사람들의 '종전'은 같은 날의 같은 사건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종전'이라는 한 단어 뒤에는, 입장과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수많은 끝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항복이 국제적으로, 법적으로 확정된 날은 언제일까요? 바로 1945년 9월 2일입니다.
이날 도쿄만(東京湾)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USS Missouri) 갑판 위에서, 일본 대표가 연합국 앞에서 항복문서(降伏文書)에 서명을 합니다. 이 서명으로 비로소 일본의 항복이 법적으로 확정됐어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8월 15일은 천황이 일본 국민에게 전쟁의 끝을 알린 날(옥음방송)이고, 9월 2일은 연합국을 상대로 항복이 공식 확정된 날(항복문서 조인)입니다. 두 날 사이에는 약 보름의 간격이 있고, 둘은 분명히 다른 사건입니다.
흥미로운 건, 일본이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終戦記念日)'이라고 부른다는 점이에요. '항복일'이 아니라 '종전일'입니다. 졌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인정하는 '항복'이라는 단어 대신, 전쟁이 (어쩐지 저절로) 끝났다는 뉘앙스의 '종전'이라는 단어를 골랐다는 것 ,이 작은 선택 하나에도 일본이 그 여름을 다르게 기억하려는 느낌이 듭니다.
미주리호 갑판 장면에는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일본 측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사람이 두 명이었다는 점이에요.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와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였습니다. 그 앞에 서서 이들을 맞이한 인물이 바로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맥아더(ダグラス・マッカーサー)였죠.

왜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을까요? 여기에 전쟁 이전 일본 국가 구조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전쟁 전 일본의 헌법인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国憲法) 아래에서, 천황은 사실상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입헌군주, 즉 나라의 원수(元首)로서의 얼굴이었고, 또 하나는 군대를 통솔하는 대원수(大元帥), 즉 군 최고지휘권을 가진 얼굴이었어요. 이 군 통솔권을 일본에서는 통수권(統帥権)이라고 불렀는데, 정부(내각)나 의회가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독립된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면 항복문서에는 누가 서명해야 할까요? 천황이 직접 나서는 건 부담이 너무 컸습니다. 만에 하나 천황이 서명했는데 통수부(군 수뇌부)가 반대하기라도 하면, 일본의 정식 대표(원수)의 의사 표시가 흔들리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천황을 대신해, 두 갈래의 얼굴을 각각 대표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나라(정부)를 대표해서는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군(대본영)을 대표해서는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가 서명한 겁니다.
서명자가 두 명이었다는 사소해 보이는 사실 하나가, 실은 전쟁 전 일본이라는 나라가 '정부'와 '군대'라는 두 축으로 갈라져 있었다는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단서인 셈입니다. 흔히 "일본 군부가 폭주했다"고 말할 때, 그 폭주를 제도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뿌리가 바로 이 통수권 독립이었거든요.
항복 이후 일본은 연합국, 정확히는 사실상 미국 단독으로 점령당합니다. 그런데 이 점령 방식이 역사적으로 꽤 독특했어요.
원래 전통적인 의미의 '점령'이라고 하면, 승전국 군대가 패전국에 직접 들어가 행정을 장악하고 통치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침략군의 무장 해제나 배상금 징수 정도에서 그치는 게 보통이었죠. 실제로 1907년에 만들어진 <헤이그 육전 법규 관례에 관한 조약 >에서도, 점령군은 '점령지의 법률이나 행정을 바꿀 권한까지는 갖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대한 점령은 이 통념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에 근거해, 일본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를 통째로 뜯어고치는 전면적인 개조에 나섰어요. 비군사화(非軍事化)와 민주화(民主化)라는 두 개의 큰 기둥을 세우고, 군국주의를 떠받치던 세력을 제거하고,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주권을 원리로 삼게 한 겁니다.
방식도 독특했습니다. 미국은 일본 국민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기존 일본 정부를 그대로 둔 채 그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간접 점령(間接占領) 방식을 택했어요. 그 명령을 내린 기관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GHQ(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였고, 그 정점에 선 인물이 맥아더였습니다.
왜 직접 통치하지 않고 굳이 일본 정부를 거쳤을까요? 여러 배경이 있지만, 천황이라는 존재가 컸습니다. 천황을 통해 명령을 전달하면 일본 사회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거든요. 비유하면, 미국은 '리모컨'을 이용하여 일본 정부라는 '기계'를 움직인 셈이었죠.
여기서 우리 입장을 한번 짚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에게 1945년 8월 15일은 '전쟁이 끝난 날(종전)'이지만, 한국에게 같은 날은 광복절(光復節), 즉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은 날입니다. 같은 날짜인데 의미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 앞서 본 만주 개척단의 비극은 우리에게도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주는 당시 수많은 조선인들이 살아가던 땅이기도 했고, 소련의 침공과 그 뒤의 혼란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었으니까요. 일본의 패전이 곧 모두의 평화로운 해방으로 이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다는 점, 이건 한국과 일본 양쪽의 기억이 겹치면서도 어긋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이날을 '항복'이 아니라 '종전'이라 부른다는 사실. '항복'은 진 것을 인정하는 단어이고, '종전'은 그저 전쟁이 끝났다는 단어입니다. 같은 사건도 어떤 단어로 부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리죠. 일본 사회가 그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하는지가, 이 단어 선택 하나에서 은근히 드러납니다.
<조선생의 일본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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