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알려조선생입니다.
제는 제가 운영하는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ALx1MKUSFG0 )에서 여러 번 교토를 '학생의 도시'라고 소개해 드린 적이 있어요. 그냥 제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숫자로도 그렇게 나타나는데요. 문부과학성 자료를 보면 2020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대학 수가 1.31개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곳이 바로 교토였습니다. 전국 평균이 0.63개였으니 거의 2배에 가까운 셈이죠. 대학 진학률도 67.8%로 5년 연속 전국 1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국립인 교토대학(京都大学), 명문 사립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과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学), 거기에 수준 높은 공립대학과 예술대학까지, 교토시 안에만 무려 38개의 대학이 있다고 해요. 시민 열 명 중 한 명이 학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죠. 수도 도쿄에 견줄 만한 엄청난 교육도시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교토는 어떻게 교육의 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은 교토의 좀 특별한 사연, 교토와 교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초등학교는 어디일까요?」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도쿄를 떠올리실 거예요. 수도니까 근대 교육도 당연히 거기서 시작됐겠지 싶죠. 그런데 정답은 교토입니다. 그것도 국가가 「학교를 만들어라」 하고 시키기 3년이나 전에 말이죠.
교토 시내 한복판, 오이케도리(御池通)에 면한 큰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교토 오이케 중학교(京都御池中学校)인데, 그 앞에 「일본 최초 소학교 류치교(日本最初小学校 柳池校)」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어요. 1869년, 바로 이 근처에서 일본 최초의 근대 초등학교인 가미교 제27번 초등학교(현재의 류치 초등학교, 柳池小学校)가 문을 열었습니다.
https://maps.app.goo.gl/88SXKLQQ8j3LbRkc8
이게 얼마나 빠른 거냐면, 메이지 정부가 새 학제(學制)를 정한 게 1872년, 의무교육이 시작된 게 1886년입니다. 교토는 그 학제보다도 3년, 의무교육보다는 무려 17년이나 앞섰던 거예요.
사실 교토가 학생의 도시가 된 배경에는 위기와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교토는 일본의 수도였던 만큼 역사적으로 오르막 내리막이 많았는데요. 19세기에도 큰 위기가 한 번 닥쳐서 인구가 절반 가까이 줄어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근대화의 시작, 메이지 정부의 출범이었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게 왜 교토에는 위기였을까요?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교토에 살던 천황이 도쿄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수도가 도쿄로 옮겨가자(도쿄 천도) 교토는 수도라는 자리를 잃어갔고, 황실과 귀족들이 떠나자 그들을 따르던 큰손들도 줄줄이 도쿄로 빠져나갔어요. 도시 전체가 쪼그라들고 위기감이 감돌던 시기였습니다.
이 위기를 이겨내려고 교토가 선택한 것이 바로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놀라운 건 — 나라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교토 사람들이 대체 무슨 돈으로 학교를 64개나 한꺼번에 지었느냐는 점입니다.
비밀은 교토만의 자치조직에 있었습니다. 원래 교토에는 주민들이 직접 꾸리던 「마치구미(町組)」가 있었는데요. 우리나라로 치면 주민자치회와 비슷한 조직이죠. 1868년, 이 마치구미가 「번조(番組)」라는 행정 단위로 새로 짜였습니다. 위쪽 동네인 가미교(上京)와 아래쪽 동네인 시모교(下京)를 합쳐 65~66개 정도였어요.
원칙은 번조 하나에 학교 하나. 그렇게 1869년 한 해 동안 무려 64개의 초등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번조가 66개인데 학교가 64개인 건, 두 번조가 학교 하나를 같이 세운 곳이 두 군데 있었기 때문이죠. 보통은 정부가 학교를 세우고 학구를 정하는 게 일반적인데, 교토는 주민 조직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 학교를 만든 겁니다. 말 그대로 나라가 아니라 주민이 먼저 움직인 거죠.
이게 얼마나 특별했냐면, 게이오 대학(慶應義塾)을 세운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도 교토를 다녀가고는 다른 지역도 교토의 학구제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학교 건물 위에 북을 달아서, 무슨 일이 생기면 주민들에게 알리는 역할까지 했다고 해요. 말 그대로 '마을 속의 학교, 학교 속의 마을'이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돈은 어떻게 모았을까요? 각 동네의 상공인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소학교 회사(小学校会社)」를 세웠습니다. 모은 돈을 밑천 삼아 다른 곳에 빌려주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로 학교를 운영했어요. 이 동네 학교에서 비롯된 학구제는 지금도 교토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대학도 마찬가지로 '주민이 먼저'였습니다. 교토 최초의 대학은 국립 교토제국대학(京都帝国大学, 1897)이 아니라, 사립인 도시샤(同志社)였어요. 1875년, 니지마 조(新島襄)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운 학교죠. 그는 젊은 시절 몰래 미국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유학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고, 앞서 이야기한 교토의 학구제에도 많은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흥미로운 건 그 자리예요. 교토 고쇼(京都御所), 그러니까 옛 황궁 바로 북쪽이라 격식으로는 교토에서 최고인 그 땅에 어떻게 기독교 대학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요? 답은 역시 도쿄 천도입니다. 1869년, 천황과 정부가 도쿄로 옮겨가자 황궁을 둘러싸고 살던 귀족들도 줄줄이 따라 떠났어요. 사람이 빠진 귀족촌은 순식간에 구경거리 가설극장이 늘어선 세속적인 동네로 바뀌었고, 1877년에는 한 평에 15전이라는 헐값으로 정부에 팔려 저택들이 헐려 나갔습니다.
도시샤 이마데가와 캠퍼스(今出川キャンパス)의 6,000평은 그렇게 비워진 다케우치·도쿠다이지·후지타니·야마시나 가문의 저택 터였어요. 바로 옆 도시샤여자대학(同志社女子大学) 캠퍼스는 니조 가문의 저택 자리였고요. 기독교 대학 바로 옆에 쇼코쿠지(相国寺)라는 큰 절이 있고, 윤동주 시인의 시비까지 함께 자리한 풍경, 이거야말로 참 교토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토대학(京都大学)은 1897년, 당시 문부대신이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가 주도해 만들어졌습니다. 고위 공무원을 키우는 데 집중했던 도쿄대학(東京大学)과 달리, 교토대학은 정치적 입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죠. 이런 분위기에는 사이온지 긴모치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는 젊을 때부터 유명한 시인들을 모아 모임을 열었는데, 100명이 넘는 학생이 모일 만큼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이 모임에서 시국을 논하다가 정부 비판이 거세질까 걱정한 당시 교토부청이 모임을 닫아버렸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사이온지 긴모치는 정치 권력과 거리를 두는 대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자유롭게 학문하는 교토의 전통도 그렇게 자리 잡게 된 거죠. 참고로 그가 만든 그 모임의 이름이 바로 '리츠메이칸(立命館)'이었습니다. 교토의 리츠메이칸 대학이 여기서 이름을 따온 건데요, 그의 비서가 세운 교토법정학교가 사이온지 긴모치의 허락을 받아 이름을 바꾸며 등장한 대학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올린 다른 영상에서 자세히 확인하실 수 있어요.
한편 교토에는 불교계 대학도 많습니다. 절이 많은 도시라 원래 승려를 키우는 교육기관이 많았는데, 메이지 시대에 불교를 배척하는 운동(폐불훼석)으로 위기를 맞으면서 일반 학생에게도 문을 열었고, 점차 대학으로 발전해 온 것이죠. 류코쿠대학(龍谷大学), 오타니대학(大谷大学), 하나조노대학(花園大学) 같은 곳이 대표적입니다.
교토에 좋은 기업이 많고, 커피로 유명하고, 트렌디한 장소가 가득한 것도 결국 이 도시가 오랜 세월 학생의 도시로 다져져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도 자리를 잃은 위기를 교육으로 돌파한 도시, 나라보다 주민이 먼저 학교를 세운 도시. 그 자유로운 학풍 속에서 공부했던 게 참 좋았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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