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가는 김에 나라도 한 번 들렀다 오자."
일본 여행 좀 해본 한국 분들이라면 한 번씩 들어보셨을 그 코스. 도쿄나 오사카에서 출발해서, 교토 며칠 보고 — 마지막 날 한 시간 정도 기차 타고 나라(奈良)로 넘어갑니다. 사슴이 절하는 영상 한 번 찍고, 사슴 센베 사 먹이고, 그 다음 코스가 거의 무조건 정해져 있죠.
도다이지(東大寺) 다이부쓰덴(大仏殿).
목조 건축으로는 세계 최대급. 안에 들어가면 16미터짜리 거대한 부처가 있습니다. 다들 사진 찍고 "와 진짜 크다" 하시잖아요. 그게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나라의 다이부쓰(大仏), 즉 비로자나불(毘盧遮那仏)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합니다.

어떤 종교든 처음부터 16미터짜리 부처상을 박아 넣지는 않잖아요. 보통 이런 거대 종교 시설은 나라가 부유하고 안정된 평화기의 산물이거든요.
그런데 8세기 나라 시대 일본은 정반대였습니다.
도다이지 다이부쓰는, 사실 1300년 전 일본의 '팬데믹 대응 토목 프로젝트'였습니다.
737년. 일본 연호로 텐표(天平) 9년. 북규슈(北九州)에서 시작된 천연두(天然痘) 대유행이 일본의 수도 헤이조쿄(平城京, 지금의 나라)를 직격합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피해 규모는 어마어마해요.
당시 일본 인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이 사망했다는 추계가 있을 정도. 더 무서운 건, 권력의 정점이 통째로 무너집니다.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핵심 4형제인 무치마로(武智麻呂), 후사사키(房前), 우마카이(宇合), 마로(麻呂) 이 네 명이 같은 해에 모두 천연두로 죽습니다. 거의 1년 만에.
조정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상황이었겠죠. 약도 백신도 없는 시대. 의학으로는 답이 없습니다.
이때 즉위해 있던 천황이 쇼무 천황(聖武天皇)입니다. 텐무 천황(天武天皇)의 증손자. 어렸을 때는 조모인 겐메이 천황(元明天皇)과 큰고모인 겐쇼 천황(元正天皇), 즉 두 명의 여제가 「중계」 역할로 정권을 받쳐줬어요. 우리가 다 아는 『코지키(古事記)』 완성이 겐메이 천황 때, 『니혼쇼키(日本書紀)』 완성이 겐쇼 천황 때입니다.
쇼무 천황의 결단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쇼무 천황의 대답은 불교였어요.
"전국에 절을 짓자. 그것도 같은 규격으로. 그 정점에 거대한 부처를 세우자. 불력(仏力)으로 이 나라를 역병에서 지켜내자."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전국 코쿠분지(国分寺)·코쿠분니지(国分尼寺) 건립입니다. 일본 전국 모든 지방(国)에 남자 승려용 코쿠분지와 비구니용 코쿠분니지를 한 쌍씩 세우라는 칙령. 그리고 이 모든 코쿠분지의 「총본부(総国分寺)」가 헤이조쿄 동쪽 도다이지였고, 코쿠분니지의 총본부가 같은 나라의 홋케지(法華寺)였어요.

여기서 한국 분들이 보시면 약간 신선한 부분.
그때까지 일본 불교는 사실상 황족·귀족 전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다이지 건립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는, 「 모든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발상이 핵심이었어요. 위에서 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래로부터 자금·목재·노동력을 끌어모은다. 그러려면 황실 불교만으로는 안 됩니다. 민중을 움직이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8세기 일본 정치의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 중 한 명이 교키(行基)라는 승려예요.
이 사람의 이력이 좀 재미있습니다.
이분은 처음엔 정통 엘리트 코스로 출발해요. 나라(奈良)에 있는 야쿠시지에서 제대로 불교를 배웁니다. 당시로 치면 국가 공인 최고 교육기관에서 수업받은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절을 박차고 나와서 산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혼자 수행을 시작해요.
여기까지는 그래도 흔한 케이스예요. 진짜 파격은 그다음이에요. 산에서 내려온 이분이 조정의 허가도 받지 않고, 민중들에게 직접 포교를 시작합니다. 당시 일본에서 승려가 일반 백성을 상대로 포교하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거든요. 완전히 룰을 깨버린 거예요.
근데 이게 먹혔어요. 따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 천 명 단위로 불어납니다.
더 놀라운 건 이분이 단순히 설법만 하고 다닌 게 아니라는 거예요. 가는 곳마다 직접 사람들을 모아서 공공사업을 벌입니다. 항구를 만들고, 저수지를 파고, 다리를 놓고, 가난한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무료 숙박소를 짓고, 수행자들이 모일 도량까지 세웁니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 각지에서요. 종교인이라기보다는, 거의 토목 엔지니어 겸 사회사업가에 가까웠던 거죠.

이 시점에 조정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 탄압. 「승니령(僧尼令) 위반」 이런 식으로 교키의 활동을 막으려는 명령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런데 도다이지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조정의 태도가 180도 바뀝니다.
쇼무 천황은 교키에게 「다이소조(大僧正)」즉, 승려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 를 직접 부여합니다. 적이었다가, 갑자기 최고 명예직. 왜 그랬을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교키가 없으면, 그 거대한 부처는 못 만듭니다. 위에서 명령만 내린다고 일본 전국에서 사람이 알아서 모이지는 않거든요. 「민중이 따르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게 교키였어요.
그러니 귀족 전용이었던 일본 불교를 「풀뿌리」에 뿌리내리게 한 첫 번째 사람이라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한일 비교 한 번 짚고 가시면 좋아요.
도다이지 다이부쓰 개안식이 752년. 같은 8세기 중반,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가 한참 잘 나가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석굴암 본존(석가여래좌상) 조성이 8세기 중반(751년 김대성 발원, 774년경 완성). 거의 동시기에 한일 양국이 거대 불상 프로젝트를 가동한 셈이에요. 다만 결이 좀 다릅니다.
규모도, 발원 동기도 다르지만 8세기 중반 한반도와 일본 양쪽에서 대승불교의 본존이 동시기에 조성됐다는 건 꽤 흥미로운 한일 비교 포인트입니다.
쇼무 천황의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자」는 발상은 사실 반쯤 성공, 반쯤 실패였어요.
특히 도다이지를 필두로 한 나라 불교 6종(케곤슈 등)이 너무 강해지면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쇼무 천황 사후, 승려가 천황 자리까지 위협하는 도쿄(道鏡)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죠.
결국 칸무 천황(桓武天皇)은 수도를 옮기는 결정을 내립니다.
794년, 헤이조쿄에서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교토)로 천도했죠. 나라 시대 끝, 헤이안 시대 시작입니다.
그런데 칸무 천황도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사상 자체는 버리지 않았어요. 단지 「나라(奈良)의 그 불교 말고, 새로운 불교가 필요하다」였습니다.
이 요청에 응한 게 그 유명한 두 천재 사이초(最澄)와 카이(空海)입니다.
이 둘의 캐릭터 차이가 정말 흥미로워요.
사이초는 일본 불교의 슈퍼스타로, 비와호(琵琶湖) 서쪽 히에이잔(比叡山)에 엔랴쿠지(延暦寺)를 열고 있던 학자형 승려였습니다. 칸무 천황의 칙령으로 견당사(遣唐使)에 합류해 당으로 건너간 사이초는 절강성(浙江省)의 영산 텐다이산(天台山)에서 당시 최신 불교를 거의 통째로 가져옵니다. 밀교, 호케쿄(法華経), 좌선 등이 다 들어 있어요. 이걸 종합한 게 일본의 텐다이슈(天台宗)라고 하는 천태종이죠. 천태종은「불교의 쇼핑몰」같다고 할까요. 한 종파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백화점식 종교였는데 그 본산이 히에이잔 엔랴쿠지였고 후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화공을 받기까지 약 800년간 일본 불교계의 정점이었습니다. 유럽 가톨릭의 바티칸 같은 위치라고 할까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 들어와서 「나는 좌선만 하겠다」(에이사이→린자이슈), 「나는 호케쿄만 읽겠다」(니치렌→니치렌슈), 「나는 좌선을 다시 한 번하겠다」(도겐→소토슈)처럼 전문점들이 갈라져 나오거든요. 출발점이 죄다 히에이잔입니다.
같은 견당사 그룹 다른 배에 탄 8세 연하의 승려로 구카이(空海)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사이초와 정반대였어요.
이분이 태어난 곳이 시코쿠의 사누키, 지금의 가가와현이거든요. 완전 시골 출신이에요. 그래도 집안은 좀 괜찮았어요. 대대로 관리를 배출한 집안이라, 아버지가 "너도 관료가 되라"고 자꾸 권했죠.
근데 본인은 생각이 달랐어요. "나는 승려가 되겠다!" 이러면서 십대 때부터 산속에 틀어박힙니다.
수행했던 장소 중에 제일 유명한 데가 토사(土佐), 지금의 코치현에 있는 무로토미사키(室戸岬)예요. 그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중에 전설 같은 일이 일어나요. 새벽 하늘에 뜨는 금성이 자기 입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는 거예요. 진짜 말 그대로 신비 체험이죠.
근데 이분, 종교에만 빠진 사람이 아니에요. 학문 능력도 압도적이었거든요. 한문은 기본이고, 심지어 통역 없이 중국어 회화까지 가능했어요.
당시 일본에서는 거의 무명. 그런데 「젊지만 쓸 만하다」고 견당사에 발탁됩니다. 더 흥미로운 건, 구카이는 사비 유학생이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국비 유학생과 달리 활동 자유도가 높았습니다.

당의 도성 장안(長安)까지 들어간 구카이는, 밀교 최고 권위 혜과(恵果) 화상에게 직접 입문해요. 혜과 문하에는 각국에서 온 영재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케이카는 구카이를 보자마자 「이 자는 된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본래라면 10~20년이 걸리는 수행을 단 반년에 끝내고, 구카이를 밀교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는 「관정(灌頂)」 의식까지 거행했다고 해요.
혜과는 구카이에게 「일본에 밀교를 전하라」 명한 뒤,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합니다. 그래서 구카이의 입당은 밀교 그 자체의 운명을 정한 사건이 됐어요. 중국 본토에서는 회창폐불(會昌の廃仏, 845년) 이후 밀교가 사실상 단절돼 버렸거든요. 결과적으로 구카이가 일본에 가져온 그 밀교가, 동아시아 밀교의 본가가 되어버렸다는 평가까지 나옵니다.
구카이의 밀교는 전국 각지를 다니며 제방·저수지 등 공공 토목 사업을 직접 지도한 민중과 함께한 종교였습니다.
근데 잠깐. 민중과 함께. 공공사업을 지도. 이거 앞에서도 나온 이야기 잖아요?
맞습니다. 나라 시대의 교키(行基)예요. 100년 뒤, 구카이가 같은 일을 다른 종파(신곤슈)로 다시 한 번 한 셈입니다.
어쨌든,
한국 분들이 나라 가서 가장 많이 사진 찍는 도다이지의 거대한 부처는, 사실 「8세기 일본 정부의 팬데믹 대응 프로젝트」였다는 건데요. 천연두로 사람이 줄줄이 죽어나가던 그 절박한 시기에, 「더 큰 부처를 짓자, 그러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발상이 1300년 뒤까지 남아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발상은 「위에서」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일본 정권이 알아챈 순간 교키, 그리고 100년 뒤의 카이 같은 「민중을 움직이는 종교인」이 일본 불교사의 진짜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죠.
| 교육의 도시 교토(도시샤대학,리츠메이칸 대학) (1) | 2026.0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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