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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후사5]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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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nsei-jojo 2026. 8. 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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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서명한 두 개의 조약, 일본은 그렇게 독립했습니다

1951년 9월 8일,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하루에 두 번 펜을 들었습니다.

오전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하우스였어요. 요시다를 포함한 전권 여섯 명이 나란히 대일강화조약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5시, 장소가 바뀝니다. 샌프란시스코만에 면한 미 제6군 사령부, 프레시디오의 장교 클럽이었죠. 여기서 조인된 것이 미일안전보장조약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서명식에서 일본 측 서명자는 요시다 한 사람뿐이었어요.

혼자 서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외무성 조약국장 니시무라 구마오(西村熊雄)가 전권위임장을 만들려고 누가 서명하느냐고 묻자, 요시다는 호시지마나 이케다에게 부탁하면 서명해주기야 하겠지만 안보조약은 인기가 없으니 정치인이 여기에 이름을 올려봐야 득 될 게 없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그 자리까지 따라온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에게도 경력에 흠이 갈 수 있으니 자신만 서명하겠다고 말했죠. 미국 측에서 국무장관 딘 애치슨을 비롯해 네 사람이 서명한 자리에, 일본 측은 한 사람만 앉아 있었던 겁니다.

같은 날, 다섯 시간 간격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앞의 조약은 점령의 종료이자 독립의 회복이었고, 뒤의 조약은 미군이 계속 일본에 남는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일본의 전후는 이 두 장의 종이가 세트로 묶이면서 성격이 정해졌어요. 오늘은 그 세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이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강화논쟁, 어느 나라와 화해할 것인가

미국이 일본과의 강화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봄 무렵이었어요. 하지만 국방부는 오래 반대했습니다. 강화가 끝나고 나면 미군이 일본에 주둔할 근거가 사라진다는 게 이유였죠. 이 생각이 뒤집힌 것이 1949년 중국혁명의 성공과 1950년 조선전쟁이었습니다. 장제스의 중국을 축으로 아시아를 관리하려던 미국의 구상이 뿌리부터 무너지자,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급격히 올라갔어요.

1950년 9월 트루먼 대통령은 국무성 고문 존 포스터 덜레스를 대일강화 예비교섭에 투입합니다.

 

그러자 일본 국내에서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흔히 강화논쟁(講和論争)이라고 부르는 이 논쟁은 1950년대 최대의 정치 이슈였어요. 쟁점은 단순했습니다. 소련과 중국, 동유럽까지 포함해 모두와 강화할 것인가(전면강화), 아니면 자유주의 진영하고만 강화할 것인가(단독강화, 편면강화라고도 했죠). 그리고 그 뒤에 하나가 더 붙어 있었습니다. 미군의 군사기지를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당시 아사히신문은 1950년 9월 20일 사설에서 강화논쟁이란 결국 어떤 일본이 태어날 것인가를 묻는 문제라고 정리했습니다. 정치 문제이자 외교 문제였던 거예요.

 

요시다 총리의 계산은 현실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진영의 침투를 막으려면 자본주의 국가하고만 강화할 수밖에 없고, 조기에 강화를 실현하려면 필요할 경우 소련과 중국을 빼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죠. 강화 뒤에도 미군이 남는 것 역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봤습니다.

반대편에는 사회당이 있었습니다. 전면강화와 비무장중립을 내걸었어요. 여기에 학자들이 가세합니다. 평화문제담화회(平和問題談話会)가 1950년 1월 15일에 발표하고 잡지 『세계(世界)』 3월호에 실린 「강화문제에 대한 성명」이 대표적인데, 전면강화와 중립불가침, 유엔 가입, 군사기지 반대, 경제적 자립을 요구했죠. 남바라 시게루(南原繁), 쓰루 시게토(都留重人),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나카노 요시오(中野好夫),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같은 이름들이 여기 있었어요.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이라 불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논리에는 윤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과 조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막대한 희생을 강요해놓고 그 나라들을 빼고 강화한다는 것은 도의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죠.

 

요시다는 이 주장에 몹시 예민하게 반응했는데요. 1950년 5월 자유당 회의에서 남바라 도쿄대 총장을 두고 곡학아세(曲学阿世)의 무리라고 몰아붙이기도 했죠. 물론 남바라는 학자에 대한 권력의 탄압이라고 맞받았습니다. 총리와 대학 총장이 공개적으로 충돌한 이 장면은 당시 여론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전후 일본에서 지식인들이 여론 형성에 이렇게 큰 역할을 한 시기는 이때가 거의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샌프란시스코에 초대받지 못한 나라들

1951년 9월 4일, 조선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가 열립니다.

이 회의의 참가국 명단이 실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중국은 초청받지 못했어요. 중화인민공화국도 중화민국도 아니었습니다. 인도와 버마는 조약 내용에 불만을 품고 참가를 거부했습니다. 소련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는 회의에 오기는 했지만 서명하지 않았어요. 결국 9월 8일에 일본을 포함해 49개국이 서명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그리고 한국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 대목은 한국 독자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에요. 미국은 1949년 12월 무렵부터 한국을 서명국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한다는 판단이었죠. 그런데 1951년 봄에 영국과 일본이 강하게 반대합니다. 영국은 한국이 대일 교전국이 아니었다는 논리를 폈고, 일본은 여기에 더해 한국이 연합국 지위를 얻으면 재일한국인 수십만 명이 연합국 국민으로 간주되어 배상 문제가 복잡해진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결국 그해 5월, 한국의 참가는 백지화됩니다.

 

일본에서 이 회의는 독립을 되찾은 날로 기억됩니다. 한국에서는 배상과 청구권의 출발선이 어긋난 날로 기억되죠. 같은 회의장을 두고 두 나라의 기억이 이렇게 갈립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이어지는 긴 갈등의 뿌리 하나가 여기에 있어요.

강화와 세 갈래 길

조약이 서명되자 일본 국내 정치가 요동칩니다.

1951년 10월 10일에 두 조약을 비준하기 위한 제12임시국회가 열렸습니다. 심의에 앞서 사회당은 10월 23일 임시대회를 열어 당론을 정하려 했지만 실패했어요. 강화조약에는 찬성하되 안보조약에는 반대하는 우파와, 두 조약 모두에 반대하는 좌파가 끝내 갈라섰습니다. 다음 날 사회당은 좌우로 분열합니다. 국회에서는 좌파가 두 조약 모두에 반대표를, 우파는 강화조약에 찬성하고 안보조약에 반대표를 던졌어요.

 

분열은 보수 쪽에도 있었습니다.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처럼 요시다의 대미 추종 외교와 비밀 외교에 강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죠.

 

정리하자면 1950년대의 일본에는 세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경무장에 통상국가를 지향하는 요시다 노선, 사회당 등이 주장한 비무장중립 노선, 그리고 하토야마와 기시가 내건 대미 자립과 자주헌법 제정의 국가주의 노선이었어요. 역사학자 이오키베 마코토(五百旗頭真)는 훗날 소련이 붕괴하고 사회주의도 제1의 요시다 노선처럼 현실적인 길이라고 하기 어려워진 것을 보면, 요시다 노선이 가장 현실적인 길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그 대가도 컸습니다. 대미 협조라는 얼굴 뒤에는 종속적인 성격이 분명히 있었고, 그것은 1960년 안보개정을 거치고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가장 아픈 사례가 오키나와입니다. 1995년 9월 4일 미군 세 명이 열두 살 초등학생을 납치하고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오키나와현경은 체포영장을 발부받고 신병 인도를 요구했지만 미국 측은 지위협정을 이유로 기소 전 인도를 거부했습니다. 2004년 8월 13일 오키나와국제대학에 미군 대형 수송헬기가 추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현경이 현장검증을 하려 했지만 미군이 현장을 봉쇄했고, 역시 지위협정이 방패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강화운동은 결과적으로 패배했지만, 그 운동이 전후 민주주의를 키운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어요. GHQ와 일본 정부가 위에서 내린 초기 개혁을 사회에 정착시킨 것은 오히려 역코스에 저항하는 혁신 세력의 운동이었습니다. 일교조(일본교직원조합)의 「제자를 다시 전장에 보내지 말라」는 구호가 그렇게 큰 힘을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죠. 주권재민과 전쟁 포기, 기본적 인권이라는 일본국헌법의 세 원칙이 사람들에게 자기 것으로 인식된 것은 1950년대 평화운동의 고조 속에서였습니다.

다시, 1951년 9월 8일

이렇게 놓고 보면 그날 하루의 두 서명이 왜 세트였는지가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독립은 진짜였습니다. 1952년 4월 28일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7년에 걸친 점령은 끝났고 일본은 주권국가로 돌아왔어요. 다만 그 독립은 미군 주둔이라는 조건을 껴안은 독립이었고, 그 조건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오키나와의 일상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의장에 한국은 없었습니다. 일본이 독립을 회복한 조약과 한국이 배제된 조약은 같은 조약이에요. 8월 15일이 두 나라에서 전혀 다른 날로 기억되는 것처럼, 9월 8일도 그렇습니다. 일본의 전후를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이 어긋남을 정확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